얼마 전에 혼자서 장편 시나리오 한편을 탈고한 재능있던 후배를 격려해주기 위해 시작된 술자리. 안 본 사이에 부쩍 초췌해진 재능있던 후배는 이번 시나리오도 반응이 시원찮으면 그냥 빚내서 독립영화나 한편 찍고 장렬하게 은퇴해야겠다며 한숨을 내쉰다.
신랄했지만 애정이 넘치는 시나리오 모니터 타임이 끝나고 유난히 기운이 없어 보이는 후배를 위로해주기 위해, 다른 사람도 아니고 재능있기로 유명했던 니가 독립영화를 만들겠다고 하니 아이템만 좋다면야 몇 백 정도는 현금 서비스를 받아서라도 투자할 의향이 있다고 술김에 헛소리를 했다. 보통 이도 저도 안되면 독립영화나 만들어야겠다고 말들은 많이 하지만 행동으로 옮기는 사람은 극히 드물기 때문이다. 후배도 그렇게 말만 하다 제풀에 지칠 줄 알았다.
그러나 재능있던 후배는 그러면 아이템 얘기나 한 번 들어보라며 술잔을 내려놓고 장황하게 피칭을 하기 시작했다. 맨 정신에 들었으면 그냥 열심히 해라, 행운을 빈다, 생각해보고 연락주겠다, 정도로 끝냈을 텐데 그 놈의 술 때문인지 우와 정말 대박 아이템이다! 이건 무조건 돈 된다! 며 입에 침을 튀기며 긍정적인 피드백을 넣어주었다. 나도 내가 왜 그랬는지는 모르겠다. 순전히 술 때문에 그런 것 같진 않고 사실은 내가 그런 긍정적인 피드백에 굶주렸기 때문에 그랬던 것 같다. 하여간 나의 긍정적인 피드백을 받고 갑자기 진지해진 후배는 나의 생각이 정 그렇다면 자기랑 나랑 가진 돈을 몽땅 모아서 독립영화 한편을 만들자고 제안했다.
어디선가 술이 깨는 소리가 들려왔고 이거 아무래도 술김에 말 한번 잘못했다가 빼도 박도 못하는 신세가 된 것 같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비록 술김에 한 헛소리긴 하지만 아이템만 좋다면 투자하겠다는 말을 한 건 사실이고, 후배의 아이템 얘기를 듣고는 이거 무조건 돈 된다! 는 말을 한 것도 사실이다. 그런데 이제와서 투자는 못하겠다고 하면 후배의 눈에 내가 어떻게 비칠지 겁이 나기 시작했다. 솔직히 돈이 되면 좋긴 하지만 돈이 안 될 가능성이 압도적으로 더 커 보이고, 무엇보다 내 주제에 몇 백이 남의 집 강아지 이름도 아니지 않는가.
재능있던 후배는 내 속마음을 눈치채기라도 한 건지 꼭 몇 백이 아니라도 상관없다며 여유되는 만큼이라도 투자해주시면 진심으로 감사하겠다고 한다. 그제서야 정신을 차린 나는 즉답을 피하고 자세한 얘기는 술깨고 다시 하자며 대충 술자리를 수습해 버렸다. 개인적으로 입으로만 영화를 찍는 사람들을 겁쟁이라고 경멸하며 속으로만 욕하는 게 취미였는데 술김에 말 한번 잘못했다가 돈 안드는 좋은 취미 하나 잃어버리게 생겼다.
재능있던 후배는 조만간 아이템을 문서화해서 이메일로 보내주겠다고 했는데 제발 안 그래주면 좋겠다. 술자리에서 헛소리 하나 들었다고 생각하고 알아서 없었던 일로 해 주면 좋겠다. 차마 내 입으로는 이제와서 생각이 바뀌었다고는 말 못할 것 같다. 저 새끼도 알고보니 입으로만 영화 찍는 놈이라는 얘기를 듣기 싫은 건 아닌데 그냥 좀 쪽팔려서 그런다.
그래도 술값은 내가 냈다.




덧글
저도 찍어봤지만.. 독립영화 어차피 헝그리입니다... 돈 백이라도 무조건 예산에 시나리오를 맞춰야지요..
시나리오에 예산 맞추면 바로.. 상업영화급 됩니다... ㅡㅡ;;
그리고 한국사회에선 술먹고 하는 웬만한 헛소리.. 다 용서됩니다. 좀 이상한 문화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