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지선 팀장 성격에 오타를 모른 척 하고 넘어갈 리는 없었다. 준호는 스스로 그렇게까지 덜렁거리는 편은 아니라고 생각하는데 왜 남들 눈에 다 보이는 오타가 자기 눈에만 보이지 않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렇다고 이제와서 오타를 수정하고 다시 출력한 뒤에 복사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자료가 준비되지 않아서 회의가 늦어지는 것보다는 오타 몇 개 있는 게 낫다고 생각했다. 시계를 보니 회의 시작까지 10분 정도 밖에 남아 있지 않았다. 대충 회의 시작 전까지는 자료 준비를 마칠 수 있을 것 같았지만 이번엔 내부 자료도 아니고 외부 회의용 자료에 오타를 쳤다는 이유로 제법 크게 혼날 것 같았다. 그냥 눈 꼭 감고 한 번 더 혼나기로 했다.
얼마 뒤에 송감독, 이작가, 박피디 등이 회의 시작 시간에 맞춰 사무실에 도착했다. 송감독과 박피디는 그동안 몇 번 얼굴을 본 적이 있었지만 이작가는 오늘이 처음이었다. 시나리오가 남자들 이야기였고 작가 이름도 이수영이라는 다소 중성적인 느낌이라 당연히 남자 작가인줄 알았는데 막상 만나고보니 의외로 푸근한 느낌의 여자 작가였다. 준호는 잠시 후에 정식으로 인사를 드려야겠다고 생각하고 일단은 회의실로 안내했다. 한지선 팀장이 잠깐 전화 통화를 하고 있는 사이에 준호는 커피와 녹차 등을 준비한 후 오늘 처음 만난 이수영 작가에게 명함을 건네주며 자기 소개를 했다.
“안녕하세요. 기획팀 봉준호입니다.”
“봉...준호요?”
수영은 준호의 명함을 보자마자 길거리에서 나이트클럽 웨이터한테 명함 받는 느낌으로 잠깐 키득거렸다. 준호에게는 너무 익숙한 반응이었다. 봉준호 감독과 동명이인이라는 점 때문에 그동안 지인들로부터 수많은 놀림과 비아냥을 받아왔기 때문이다. 봉준호 감독이 플란다스의 개로 데뷔했을 때까지만 해도 이름 때문에 놀리는 사람은 없었는데, 살인의 추억으로 뜨기 시작한 후부터 슬슬 이름 때문에 놀리는 사람이 하나 둘 씩 생기더니, 괴물로 한국 최고의 흥행 감독으로 등극한 뒤부터는 만나는 사람마다 넌 봉준호 감독이랑 이름은 똑같은데 왜 그 모양이냐고 놀려댔던 것이다.
몇 년 전 봉준호 감독이 괴물을 촬영하는 동안 준호도 영화학과 졸업 작품을 촬영하고 있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봉준호 감독의 괴물과는 달리 준호의 졸업 작품은 어디에 내놔도 부끄러운 수준의 작품이었다. 준호는 졸업과 동시에 졸업 작품을 폐기 처분했고 같이 작업을 했던 스태프들과 졸업 작품 심사를 했던 교수들 몇 명 말고는 아무도 준호의 졸업 작품을 본 적이 없었다. 준호 스스로도 자신의 졸업 작품이 허접하다는 사실은 인정하고 있었지만 자신의 영화적 재능만큼은 봉준호 감독의 영화적 재능보다 뛰어나다고 언젠가는 세상이 알아줄거라고 굳게 믿고 있었다. 이수영 작가는 어느새 웃음끼가 사라진 얼굴로 준호에게 물어왔다.
“본명이세요?”
“네. 민증 보여드릴까요?”
“아니에요. 아! 웃어서 죄송해요.”
“괜찮아요. 나중에 제가 더 유명해지면되죠. 뭐.”
준호의 썰렁한 멘트에 다들 피식 웃었다. 준호는 자신의 조크 덕분에 회의실 분위기가 한결 부드러워졌다고 믿었다. 그러는 사이에 한지선 팀장이 늦어서 죄송하다는 말과 함께 회의실로 들어왔다. 비가 와서인지 어둡고 칙칙했던 회의실 분위기가 지선의 등장과 함께 한순간에 밝아졌다. 지선은 비록 얼음 공주라는 별명이 어울릴 정도로 까칠하고 차가운 성격이었지만 굉장한 미인이었다. 지선에게 매일같이 구박을 받는 준호조차 지선의 미모만큼은 인정하고 있었고 아무에게도 말은 안했지만 저런 굉장한 미인과 팀장과 사원 사이로 만나게 된 운명을 안타까워하고 있었다. 지선은 준호의 맞은 편 자리에 앉자마자 자신의 앞에 놓여있는 자료에서 오타를 발견하고 준호에게 싸늘한 시선을 보냈다. 준호는 지선이 오타를 발견하고 인상을 찌푸리는 것을 확인하자마자 고개를 푹 숙이고는 회의가 끝날 때까지 절대로 시선을 마주치지 말아야겠다고 결심했다. 어차피 회의가 끝나면 잔뜩 혼날텐데 굳이 지금부터 무언의 꾸중을 받고 싶지는 않았다. 지선은 자신의 시선을 피하는 준호를 보고 한숨을 쉰 뒤 시나리오에 대한 대략적인 의견을 얘기하기 시작했다.
준호는 시나리오 회의가 지겨웠다. 뭘 고쳤는지는 알겠는데 애초에 재미가 없는 시나리오여서 굳이 고칠 필요조차 없다고 생각했다. 맨 처음에 기획팀에 들어와서 이 시나리오를 읽어봤을 땐 충무로에 이 정도로 재미있는 시나리오가 없나 의아했지만 아직 생긴 지 얼마 안 된 신생 영화사 입장에서는 어쩔 수 없는 일이겠거니 생각하고 있었다. 보통은 시나리오가 완성되면 메이저 영화사부터 돌리기 때문에 진짜 괜찮은 시나리오였다면 메이저 영화사에서 놓칠 리가 없었을 것이고 그런 메이저 영화사에서 퇴짜 맞은 시나리오들만 돌고 돌아 이런 신생 영화사로 흘러들어온다는 얘기를 여러 번 들어온 터라 왠지 기운이 나질 않았다. 누군가는 이런 푸념을 늘어놓고 있던 준호에게 그러면 그 회사 관두고 메이저 영화사로 가라는 얘기를 조언이랍시고 해줬지만 그게 어디 맘대로 되나. 안 그래도 가려고 했었지만 일찌감치 서류 전형에서 탈락한 신세였고 그나마 여기라도 다닐 수 있다는 사실에 감사해하고 있었다.
지선과 송감독이 뭔가 열심히 얘기하고 있었지만 준호의 귀에는 하나도 들어오지 않았다. 자신이 애써 준비한 회의 자료를 아무도 참고하고 있지 않다는 사실 때문에 기분이 나쁠 뿐이었다. 이번에 고쳐온 시나리오가 지난 번 시나리오들과 어떤 점이 달라졌는지 등을 꼼꼼이 정리해뒀건만 아무도 자신의 수고를 알아주지 않아서 허무했고 회의실 안의 그 누구도 자신의 의견 따위는 궁금해하지 않는 분위기라 괜히 주늑까지 들었다. 하지만 막상 누군가가 자신의 의견을 물어봐준다 해도 딱 부러질만한 대안을 내놓을 자신은 없었다. 다 필요없고 그 때 졸업 작품만 잘 찍었으면 지금쯤 감독님 소리 들으며 장편 데뷔작을 찍고 있을 지도 모른다는 생각만이 머리 속에서 뭉개 뭉개 피어오르고 있었다.
이런 저런 생각에 멍해 있다가 문득 정신을 차리고 주변을 돌아보니 회의실 분위기가 잔뜩 가라앉아있었다. 어쩐지 이번에 고쳐온 시나리오도 한지선 팀장의 마음에 들지 못한 것 같았다.
2009/05/18 엔딩크레딧_1회 [10]




덧글
류제 2009/05/20 01:10 # 삭제 답글
후회하지 마시고 계속 써주세요!! 재밌는걸요ㅋㅋㅋㅋ밑에서 다섯째 줄 오타있어요 '주늑'
아날맨 2009/05/20 02:34 # 삭제 답글
비공식업무일지에서 엔딩크레딧으로 이어지는 OSMU를 몸소 실천하구 계시군요ㅎㅋ
마력덩어리 2009/05/20 03:08 # 답글
ㅎㅎㅎ
키세츠 2009/05/20 09:41 # 답글
일단은 하렘루트입니다!!!
두부 2009/05/20 15:10 # 답글
어째... 준호는 만나는 모든 여자들과 사랑에 빠질 것 같은 타입이란 느낌이 드네요.“괜찮아요. 나중에 제가 더 유명해지면되죠. 뭐.” -> 정말 귀여운 대사입니다.
오타를 발견했습니다. 뭉개뭉개-> 뭉게뭉게
파트맨 2009/05/20 22:09 # 삭제 답글
자신의 영화적 재능만큼은 봉준호 감독의 영화적 재능보다 뛰어나다고 언젠가는 세상이 알아줄거라고 굳게 믿고 있었다'이부분 애드맨님의 전형적인 레파토리 ㅋㅋ
엘 2009/05/22 03:04 # 답글
꺅꺅 좋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