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엔딩크레딧_4회 엔딩크레딧

 

 준호는 회의실에서 나오자마자 책상 밑에 숨겨둔 양말을 꺼내 신고 나갈 준비를 했다. 양말이 아직 덜 말라서인지 기분이 아주 거시기했지만 점심 시간에 영화학과 후배 형준이가 최근에 쓴 시나리오를 들고 회사 앞으로 온다고 했으니 양말이 다 마를 때까지 기다릴 수는 없었다. 아니나 다를까 12시 정각이 되자 형준이에게 회사 앞에 도착했다는 문자가 도착했다.


 “형. 안녕하세요.”


 형준은 빌딩에서 나오는 준호를 발견하자마자 고개를 꾸벅 숙이며 정중하게 인사부터 했다. 준호는 자기에게 언제나 지나칠 정도로 깍듯하게 예의를 차리는 형준이 조금 부담스럽긴 했지만 그리 싫진 않았다. 형준과 함께 있으면 왠지 거물이 된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다.


 “비 오는데 멀리서 오느라 수고했다. 그러게 파일로 보내라니깐.”

 “파일로 보내는 건 좀 그래서요. 형을 못 믿는 건 아니지만 아이디어 도용이나 유출의 위험이...”

 “알았어. 알았어. 점심 안 먹었지? 뭐 먹을래?”

 “아무거나 잘 먹는 거 아시잖아요. 헤헤.”


 준호는 형준을 평소 자주가는 저렴한 백반집으로 데려갔다. 형준은 자리에 앉자마자 배낭에서 두툼하게 제본된 시나리오 한 부를 꺼내 준호에게 건넸다. 준호는 시나리오를 받자마자 제목만 확인하고 대수롭지 않다는 듯 옆자리에 내려놓았다. 준호가 시나리오를 의자 위에 내려놓자 형준의 표정이 미묘하게 일그러졌다가 금방 펴졌다.


 “우와 왜 이렇게 두꺼워? 몇 페이지야?”

 “130페이지요.”

 “너무 두꺼우면 사람들이 읽기 싫어하는 거 알지? 딱 70에서 80페이지 정도가 좋다니깐.”

 “쓰다보니까 그렇게 되더라구요. 헤헤.”

 “제목도 좀 거시기한데? ‘속도위반’이 뭐냐? ‘속도위반’이...”

 “좀 올드한가요?”

 “올드하고 말고 문제가 아니고 아휴~ 여하튼 이번엔 무슨 내용이야?”

 “말로 설명하긴 좀 그런데...”

 “그냥 대충만 얘기해봐. 25자 이내로 요약 몰라?”

 “음... 그러니까 한물 간 아이돌 스타가 있는데요. 어느 날 어떤 처음 보는 남자애가 느닷없이 찾아와 자신이 그 아이돌 스타가 속도위반해서 낳은 아들이라며 바득바득 우겨대기 시작하는 거죠. 그것도 애까지 달고 나타나서....”


 형준이 한참 신이 나서 시나리오의 줄거리를 설명하고 있는 와중에 느닷없이 식사가 나왔다. 준호가 수저통을 열려고 하자 형준이 아차! 싶은 얼굴로 잽싸게 수저통에서 숟가락과 젓가락을 꺼내 준호에게 건넸다. 준호는 형준이 건네는 숟가락과 젓가락을 받아서 자리에 놓고는 뭔가를 곰곰이 생각하는 얼굴로 물컵을 들어 천천히 입에 가져갔다. 형준은 준호의 입에서 무슨 말이 나올지 몰라 초조했는지 침을 꼴각 삼켰다.


 “오케이! 대충 알겠어.”

 “어때요?”

 “형준아.”

 “네?”

 “형이 너 생각해서 하는 말이니까 기분 나쁘게 듣지 말고.”

 “그럼요. 그냥 편하게 말씀해주세요.”

 “앞으로 새로 시나리오 쓰기 전에는 형한테 미리 컨펌 받고 쓰라고 얘기했어? 안했어?”

 “하셨죠.”

 “근데 이번엔 왜 컨펌 안 받았어?”

 “이번엔 느낌이 좋았거든요.”

 “느낌이 좋았다 이거지? 그래. 일단 먹고 얘기하자. 먹어. 국 다 식겠다.”


 형준은 이번 시나리오도 글렀다는 표정을 짓고 있는 준호를 보고 있으려니 밥맛이 확 달아나버렸다. 말 그대로 형준이 영화판에서 믿을 사람이라고는 오로지 준호 뿐이었기 때문이다. 비록 영화학과를 다니긴 했지만 내성적인 성격 탓에 인간관계가 좁은 형준은 준호 말고는 아는 영화인이 없었다.  형준은 과거에 준호의 졸업 작품 스태프였다는 인연으로 졸업 이후에도 줄기차게 시나리오를 건네주고 있었고 준호도 진심으로 형준이가 잘 되길 바래주는 사이였다. 모두가 준호의 졸업 작품을 무시하고 괄시했어도 형준이만큼은 준호의 졸업 작품을 감동적으로 봤다고 응원해주었기 때문이다. 두 사람은 식사를 마치고 근처 커피전문점으로 자리를 옮겼다.


 “이거 다 쓰는데 몇 일 걸렸어?”

 “한 석 달 정도요.”

 “아르바이트는 잘 하고 있고?”

 “시나리오에 전념하려고 그만뒀었는데 다시 슬슬 구해보려구요.”

 “미안하다. 형이 괜찮은 자리 하나 소개시켜줘야 되는데 요즘 영화계가 워낙 어려워서.”

 “아유 괜찮아요. 연출부는 적성에 안 맞아서요. 그냥 시나리오 쓰는 게 좋아요.”

 “그래 너도 이젠 슬슬 입봉해야 되는데...”

 “뭐. 저도 그러고 싶긴 한데.”

 “그러고 싶으면 잘 써야지. 이런 거 쓰면 입봉 못하지. 자꾸 감 못 잡고 엄한 거만 쓰면 어떡해? 요즘 트렌드를 잘 연구해보라니깐. 그리고 시나리오 쓰기 전에 시놉시스 먼저 써서 컨펌받고 시나리오 쓰라니까 왜 자꾸 형 말을 안 들어? 그럼 시간도 절약할 수 있고 시행착오도 줄일 수 있고 좋잖아. 형 안목 못 믿니?”

 “아...‘속도위반’으로는 좀 힘들까요?”

 “그러니까 초반엔 갈등 좀 있다가 결국엔 화해하고 가족의 소중함을 깨닫는다는 뭐 그런 얘기지? 요즘 세상에 그렇게 뻔하고 고리타분한 얘기가 먹힐 것 같애? 좀 참신하고 쌈빡한 아이템 없을까?”


 형준의 입에서 자신도 모르게 한숨이 나왔다. 자그만치 삼개월동안 공들여 쓴 시나리오를 제대로 읽어보지도 않고 퇴짜를 놓는 준호가 원망스러웠다. 가족의 소중함을 깨닫는다는 얘기가 뭐가 어때서! 라고 항변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준호는 ‘영화사 직원’이고 자기는 ‘백수나 다름없는 시나리오 작가 지망생’이라는 자격지심 때문에 아무 소리 못하고 있는 자신이 답답하고 한심스럽게 느껴졌다.


2009/05/21   엔딩크레딧_3회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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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글

  • 마력덩어리 2009/05/23 01:21 # 답글

    은근 중독성 발동. ㅎㅎㅎㅎㅎ
  • ....... 2009/05/23 02:14 # 삭제 답글

    오오 오늘 내내 대기타고 있었는데 나왔군요 ㅇㅂㅇ
  • 지나가다 2009/05/23 03:31 # 삭제 답글

    오오..흥미로운데요. 여기까지 읽고 나니 앞으로의 전개가 기대됩니다. 짐작하는 것도 있지만 세줄요약으로 끝나는 건 아니니까요. 저 시나리오를 누군가 보고 오해가 생기고 어쩌구 저쩌구 하겠군요....계속 올려주세요~
  • 우석양 2009/05/23 08:08 # 답글

    과속스캔들을 퇴짜 놓은거군요..저라다 피눈물 흘릴듯..^^;
  • 베리배드씽 2009/05/23 15:05 # 답글

    준호 그래도 마음 고쳐먹고 대박 나면 좋겠는데요 -_-
  • 맨드애 2009/05/24 02:57 # 삭제 답글

    주말엔 쉬나요?
  • 두부 2009/05/24 15:29 # 답글

    자자 5회 고고씽~
  • 2009/06/02 02:57 # 답글

    앙앙 재밌어요. ^ㅅ^
  • 키세츠 2009/06/02 17:41 # 답글

    크흑!!! 저거슨..!!!

    그나저나 미묘하게 성별이 바뀌어 있군요.
  • 마력덩어리 2009/06/10 07:15 # 답글

    형 안목 못 믿니...형 안목 못 믿니...형 안목 못 믿니...형 안목 못 믿니...
    5회읽고 다시 와서 4회 읽었는데 오늘따라.. .형 안목 못 믿니 가... 강조되서 보이는 이유는....ㅎㅎㅎ
    형 안목 못 믿니.빨리 쓰면 허접해지거든. ㅎㅎㅎ
    애드맨님도 천천히!ㅎ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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