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편, 준호가 형준을 만나 시나리오 컨설팅을 해 주고 있는 동안 지선은 회사 근처 카페에서 7년 사귄 남자친구 민석을 만나고 있었다. 민석은 지선과 처음 만났을 당시만 해도 장래가 촉망되는 전도유망한 조감독 신분이었으나 감독 입봉을 준비하면서부터 일이 지지리도 안 풀리는 바람에 현재는 반백수 감독 지망생 신세였다. 지선은 얼마 전부터 민석만 보면 울화통이 터질 것만 같았다. 마치 반토막난 오래 묵힌 펀드 보는 심정이랄까? 아닌게 아니라 7년 전의 지선은 한참 잘 나갔었기 때문이다. 배우보다 예쁜 마케터로 유명했었고 이름만 대면 알만한 잘 나가는 영화인들이 번갈아가며 대시했을 정도였다.
지선은 자신에게 대시했던 그 수많은 남자들 중에 지금은 민석보다 못 나가는 남자가 없다는 사실만 생각하면 자신도 모르게 속이 답답해지고 소화가 안 되고 까닭없이 분노가 치밀어올랐다. 아무래도 홧병에 걸린 것 같았다. 설상가상으로 민석은 몇 년 전부터는 쓰라는 시나리오는 안 쓰고 친구들과 게임이나 하러 다니면서 하릴없이 세월만 보내고 있었다. 지선이 시나리오 좀 쓰라고 닦달할 때마다 한국 영화계가 어려워져서 시나리오 써봤자 소용없다는 말만 되풀이 했다. 차라리 깔끔하게 영화를 접고 다른 일이라도 하면 좋겠는데 영화판에 뭔가 미련이 남았는지 예전에 함께 일했던 감독님들이나 스태프들과의 술자리에는 빠짐없이 꼬박 꼬박 참석했다. 암튼 마음에 드는 구석이 한 군데도 없었다.
지선의 친구들은 7년째 지지리 궁상을 떨고 있는 민석을 두고 늦었다고 생각할 때가 가장 빠를 때라거나 남녀관계에도 손절매 타이밍을 잘 잡아야 된다면서 하루 빨리 헤어지라고 조언해줬지만 지선이 그걸 몰라서 민석을 만나고 있는 건 아니었다. 지선은 섣불리 민석과 헤어질 수가 없었다. 그동안 자신이 민석에게 투자한 게 얼만데 만약 민석이 지선과 헤어지자마자 감독 입봉에 성공해서 대박이라도 치면 어떡하나 걱정이 됐기 때문이다. 솔직히 그럴 가능성은 매우 희박해보이기는 했지만 사람 일이라는 게 어떻게 될지 모르는 법이기도 하고 실제로 찌질하다고 무시했던 사람들이 모두의 예상을 깨고 대박을 치는 경우를 직접 목격한 적도 많았기에 차마 민석을 손절매해버릴 엄두는 나지 않았다.
민석은 지선이 이런 생각을 하는걸 아는 지 모르는지 테이블 맞은 편에 앉아 있는 지선을 보고 바보처럼 헤벌레 웃고만 있었다. 지선은 왠지 기분이 나빴다. 민석이 저렇게 바보처럼 웃을 때는 꼭 뭔가 아쉬운 소리를 했기 때문이다.
“왜 왔어? 나 바쁘단 말이야.”
“그게 남자친구한테 할 소리냐? 기껏 자기 보고 싶어서 회사 앞까지 찾아 왔구만.”
“진짜 내가 보고 싶어서 온 거면 이런 소리 안 하지. 암튼 시간 끌지 말고 빨리 용건만 말해.”
“서럽다. 서러워. 찬바람이 쌩쌩부는구나.”
“할말 없음 나 들어갈게. 오후에 미팅 있거든.”
“누구?”
“몰라도 돼.”
“야 쓸데 없는 감독들 만나고 다니지 말고 나한테만 올인하라니까! 니네 회사는 어쩜 그렇게 인재를 몰라보냐. 나 못 믿어?”
“어 못 믿어.”
“어휴. 알았으니까 돈 좀 빌려줘.”
“뭐? 너 말 참 쉽게 한다? 얼마 전에 빌려준 건 어쩌구?”
“영화계가 어려운 거 다 알면서 그런다. 조만간 계약하면 이자까지 쳐서 갚아줄게. 이번엔 정말 느낌이 좋아. 설마 나 못 믿는 건 아니겠지?”
아 진짜 밉상도 이런 밉상이 없다. 지선이 민석에게 꼬박 꼬박 용돈을 챙겨주며 부양하다시피한지도 벌써 3년 가까운 세월이 흘렀다. 그러나 먹구름이 거치고 밝은 햇살이 나타날 기미는 보이질 않았다. 사실 상황이 이 지경에 이른 데는 지선에게도 조금은 책임이 있었다. 7년 전 민석이 전문 조감독 자리까지 제안 받으며 연봉 5천이 조금 넘는 블록버스터 조감독으로 잘 나가던 시절 이젠 조감독은 그만두고 감독 입봉 준비에 전념하라고 닦달했던 건 지선 본인이었기 때문이다. 물론 지금은 그 때 괜한 소리를 했었다고 생각한다. 후회막심이었다.
2009/06/09 엔딩크레딧_5회 [7]




덧글
엘 2009/06/21 00:11 # 답글
크아. 정말 후회막심일 듯. ㅠㅅㅠ 지선양의 속내가 얼마나 타들어갈꼬.
팬 2009/06/21 01:19 # 삭제 답글
바쁘신가봐요. 읽으려니 지난편 내용이 생각안난다는...;;;
박승희 2009/06/21 02:57 # 삭제 답글
와 ~와 ~ 오늘 새 글이 올라왔네요 ^^전 운이 좋은가봐요 ㅎㅎ
감사합니다 ^^
다음편도 기대되요 ~~
반백수감독지망생 2009/06/21 07:33 # 삭제 답글
영화판에서 있을 법한 일이라 잼있긴 한데..대사빨이 쩌어억~ 입에 달라붙는 감칠맛이 없네요.
소설이나 시나료나 역시 대사빨이 살아야 제맛.
.. 2009/06/21 14:35 # 삭제 답글
7회는7월에 올리실꺼죠?
reel 2009/06/21 21:58 # 삭제 답글
어째 자서전 쪽으로 흘러가고 있는듯
ㅋㅋ원조 2009/06/22 06:53 # 삭제 답글
이거슨 픽션.
베리배드씽 2009/06/22 11:58 # 답글
이 부분은 여기 내용만 읽어도 무척 실감나네요.저런 여자들이 얼마나 많겠어요 ㅠㅠㅠㅠㅠ
두부소녀 2009/06/22 19:48 # 답글
과연 투자한 것의 보람을 느낄까요.아무튼 오랜만에 올려주셔서 감사합니다. 넙죽.
파트맨 2009/06/24 02:10 # 삭제 답글
차라리 '발정난 나의 도시 시즌2'로 갈아타시는게 어떨까요? -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