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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해가는 영화사 직원의 진로상담 비공식업무일지


친구가 회사를 그만두고 영화 일을 하고 싶다고 했다. 몇 년 전부터 그런 말을 입버릇처럼 자주 하곤 했지만 이젠 어린 나이도 아니고 남들은 못 들어가서 안달이고 다니고 있는 사람은 나오기 싫어서 안달이고 심지어는 신도 부러워하는 직장이라는 번듯한 대기업을 설마 제 발로 뛰쳐나올 리는 없을 것 같아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었다. 그냥 배부른 소리하는 줄로만 알았다. 그런데 한 달 안으로 사표를 낼 예정이라며 구체적으로 날짜까지 얘기하는 걸 보니 이번에는 진짜로 그만두려는 것 같았다. 회사 얘기를 들어보니 내가 친구라도 다니기 싫을 것 같긴 했다. 역시 세상엔 공짜는 없는 것이다.

그렇지만 말렸다. 진정한 친구라면 말리는 게 맞다고 생각했다. 친구는 내 마음은 잘 알겠는데 많이 생각해서 내린 결정이라며 진지하게 진로 상담을 부탁했다. 나는 분명히 말렸다고 나중에 내가 말렸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 달라고 신신당부를 하면서 구체적인 진로 상담에 들어갔다. 일단은 니가 되고 싶은 게 뭐냐고 물어보았다. 감독이 되고 싶은 거라면 영화 아카데미 같은 곳에 진학하거나 단편 영화를 찍어보거나 방에 틀어박혀서 장편 시나리오를 쓰면 되고 작가가 되고 싶은 거라면 시나리오 학원 같은 데 다니면서 글만 쓰면 되고 PD가 되고 싶은 거라면 제작부를 하거나 돈 많은 지인을 끌어들이거나 CJ엔터테인먼트에 들어가면 된다고 조언해 줄 생각이었다. 그런데 친구는 그런 일은 하기 싫고 기획 일을 하고 싶다고 했다. 정확히는 기획 일만 하고 싶다고 했다. 그냥 데스크 일만 하고 싶다는 거다.

조금 당황스러웠다. 그래서 니가 생각하는 기획 일이 뭐냐고 물어보았다. 친구는 어떤 이야기가 재미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면 그걸 영화로 만들라고 시키는 일이 기획 일 아니냐고 대답했다. 나는 그게 기획 일이 맞는지는 잘 모르겠는데 지금 니 상황에서 니가 생각하고 있는 기획 일을 한다는 건 현실적으로 어려울 것 같다고 솔직하게 얘기해주었다. 친구는 그럼 어떻게 해야 자기가 생각하는 기획 일을 할 수 있는 건지 알려달라고 했다. 나는 잘은 모르겠지만 아마도 니가 지금 다니고 있는 대기업에서 초고속 승진을 해서 파워맨이 된 다음 영화 사업부 같은 걸 만들어서 거기 ‘짱’이 되면 니가 생각하고 있는 기획 일을 할 수 있을 것 같다고 조언해주었다. 회사에서 나와 바닥부터 새출발하는 것 보다는 그게 훨씬 빠를 거라고 추가 설명도 해주었다.

친구는 알았다고 했다. 내 말을 잘 알아들었다면 한 달 안으로 사표를 내진 않겠지만 어차피 사람 일은 모르는 거고 회사를 그만두면 더 잘 될 수도 있는데 괜한 소리를 한 것 같아 조금 미안했다.  




덧글

  • 오리지날U 2010/02/14 08:30 # 답글

    애드맨님도 여러모로 고생하시는군요..(..)

    그나저나 새해엔 대-박입니다 ! ㅋ
  • 라라 2010/02/14 10:33 # 답글

    트랜스포머 수입한 영화사 대표 경력이 특이하던데

    씨네 21에서 보니 원래는 광고회사 다니다 그리 됐는데

    한국 영화도 기획 제작하는데

    롤모델로는 그 사람이 적당해 보이네요 한번 찾아서 읽어보라 하시죠
  • 헨_ 2010/02/14 12:16 #

    음.. 일개 기획이 어떤 이야기가 재미 있다고 바로 그 영화를 만들라는 지시를 내릴 수 없..죠;; 이건희 급이 아닌 이상은.
    마켓 리서치라는 게 있고 돈 대는 제작자도 있고 따라서 정해진 예산과 예상 수익에 따라 고를 수 있는 시나리오와 영입할 수 있는 연출, 만들 수 있는 작품이 달라집니다. 작은 회사라면 선택권이 더 적겠죠. 열심히 한다고 해서 원하는 작품을 만들 수 있는 것도 아니며 배우에 시나리오 작가 연출, 하다못해 편집하는 사람이나 스텝 막내에 이르기까지 전부 "자기 뜻대로"영화를 끌고 가길 원합니다. 그 주도권을 누가 잡느냐에 따라 배가 에베레스트 산으로 갈 수도 있죠.
    한 마디로 한국이 아니라 세상 어디에도 만들고 싶은 영화를 "기획만"할 수 있는 기획은 없다는 겁니다.
  • 당근 2010/02/14 12:58 # 답글

    일에 환상을 가지면 안되는데.. 친구분이 너무 영화일에 환상을 많이 갖고 계신 듯..
    그런 상태에서 많이 생각을 해봐야 당연히 기존 일을 때려치겠다는 생각이 들 수 밖에 없지요..
  • 평민 2010/02/14 14:08 # 답글

    어...엄청난 이상론이다.
  • msz006 2010/02/16 10:12 # 삭제 답글

    이건 세상에 흔히 있는 게임기획자 지망생들의 착각과 똑같군요. 어째서 '기획'이라는 단어가 들어가면 이렇게 환상적인 일일거라는 망상에 빠지는건지..
  • 2010/02/16 23:33 # 답글 비공개

    비공개 덧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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