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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문은 신경쓰지 마라 비공식업무일지


소설가 김훈은 ‘칼의 노래’를 쓸 때 “버려진 섬마다 꽃은 피었다” 한 줄에서 막혀 버렸다고 한다. ‘꽃은 피었다’와 ‘꽃이 피었다’를 놓고 극심한 고민을 했기 때문이란다. 그만큼 소설가에게 문장은 중요한가보다. 그렇다면 시나리오 작가는 어떨까? 예전에 어떤 시나리오 작가님이 ‘유리, 산에 가다’와 ‘산에 가는 유리’를 놓고 한참을 고민하는 걸 목격한 적이 있다. 나는 그 과정을 옆에서 묵묵히 지켜보다 시나리오가 소설도 아니고 그런 거 고민할 시간에 아이디어 하나라도 더 구상하는 게 낫지 않겠냐고 솔직한 심정을 토로한 적이 있는데 그분께선 시나리오 작가도 작가이므로 소설가가 문장으로 승부하듯 시나리오 작가는 지문으로 승부해야한다고 주장하며 고민을 계속 하셨다. 그날 저녁엔 지문에 자신만의 개성을 담아야 다른 작가들과 차별화된 매력으로 피디들에게 어필할 수 있다고도 덧붙여 주장하셨다.

실제로 그분은 지문을 감각적으로 잘 쓰는 걸로 유명했고 읽는 이로 하여금 재미는 모르겠지만 뭔가 있어 보이긴 한다는 평가를 받기 일쑤였다. 물론 지금은 그분이 ‘유리, 산에 가다’와 ‘산에 가는 유리’중 어느 쪽을 선택했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당연한 거 아닌가? ‘유리, 산에 가다’나 ‘산에 가는 유리’나 읽는 이에겐 그게 그거다. 그러나 그 당시엔 그분의 주장이 그럴 듯하게 들렸고 진짜 그래야 되는 줄 알았다. 그분은 전도유망한 작가라는 평가를 받고 있었고 나는 내세울 것 하나 없는 이제 갓 영화학과 졸업생이었기 때문이다. 원래 그 상황에선 중박 작품 하나만 했어도 다 대단하게 보이는 법이다. 이런 걸 ‘분해의 오류’라고 하던가? 암튼 나는 그분 말이 맞다고 생각했고 한동안 시나리오를 쓸 때마다 ‘유리, 산에 가다’와 ‘산에 가는 유리’를 놓고 한참을 망설이기도 했다. 그러던 내 마음 속에 의혹의 싹이 자라기 시작한 건 지문을 발로 쓴 듯한 시나리오도 이야기만 재밌으면 영화화 되는데 반해 감각적인 지문으로 유명한 그분의 시나리오는 메인 투자와 캐스팅에 번번히 실패하다 결국엔 엎어지는 걸 여러 번 지켜보고 난 후부터다. 감각적인 지문은 시나리오를 구원하지 못했다.

이왕이면 다홍치마라고 없어 보이는 지문보다는 뭔가 있어 보이는 지문이 낫긴 하다. 시나리오가 재미는 없어도 지문이 감각적이면 필력은 있다는 평가를 받을 수 있고 어쩌면 윤색 작업을 의뢰받을 수도 있다. 한국 영화계에서 윤색 전문 작가라는 직업이 성립 가능한지는 모르겠는데 가능하다면 뭐 나쁘지 않을 수도 있겠다. 그러나 윤색 열 번 하느니 오리지널 한 편 쓰는 게 여러모로 나을 것이다. 지문은 일단 이야기가 재미있고 난 다음 문제다. 글꼴도 마찬가지다. 분명 글꼴은 시나리오의 첫인상이다. 시나리오의 전체적인 느낌을 전달하는데 도움이 되는 글꼴이 있긴 하다. 예를 들어 로맨틱 코미디가 명조체라면 좀 뜬금없긴 할 것이다. 그래도 글꼴에는 신경쓰지 마라. 정 고민되면 그냥 바탕체로 해라. 로맨틱 코미디가 명조체여도 재미만 있다면 영화화에는 아무런 지장이 없을 것이다. 오타와 비문도 마찬가지다. 몇 날 며칠을 오타 체크만 하다 자기 눈에는 더 이상 오타가 보이지 않는다며 오타 체크를 부탁하는 작가를 본 적이 있는데 다른 건 다 완벽하다고 판단했으니 그랬겠지만 그럴 시간 있으면 대사라도 한 번 더 점검하는 게 낫다. 오타 좀 있으면 어떤가? 국어능력인증시험 볼 건가? 소설가의 문장과 시나리오 작가의 지문은 전혀 다른 개념이다. 시나리오는 시나리오일 뿐이다. 지문에는 신경쓰지 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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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문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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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나리오 이렇겐 쓰지 마라 


덧글

  • . 2011/04/26 22:26 # 삭제 답글

    ‘꽃이 피었다’와 ‘꽃이 피었다’를 놓고 극심한 고민을 했기 때문이란다. ...과연 극심한 고민을 할 만 하군요.
  • Annihilator 2011/04/27 00:04 #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뿜고 갑니다
  • ㅇㅇ 2011/04/27 00:55 # 삭제

    ㅋㅋㅋㅋㅋㅋ틀릴수도 있쬬 ㅋㅋㅋㅋㅋㅋ
    애드맨님 빨리 수정해주thㅔ여!!
  • 애드맨 2011/04/27 01:46 #

    과연 ㅋㅋ 고쳤습니다 ㅋㅋㅋ
  • 2011/04/26 22:35 # 답글 비공개

    비공개 덧글입니다.
  • ㅋㅋ원조 2011/04/26 23:34 # 삭제 답글

    저는 <맑은 고딕>을 추천합니다. 그리고 "유리, 산에 가다"와 "산에 가는 유리"를 고민하신 그 작가님이
    흥행작은 없을지 몰라도 명작을 쓸 가능성은 충분하다고 보입니다.
  • 그냥 2011/04/28 02:28 # 삭제

    저도 맑은 고딕을 추천합니다. 가독성 최고에요. 그렇게 느끼는 분이 또 있다니 반갑네요 ㅋㅋㅋ
    근데 관계자가 출력해놓은 거 보면 바탕체일 때가 있다는 거 ... 맑은 고딕 기본 폰트 아닌가요?
  • ArchDuke 2011/04/27 00:29 # 답글

    최근 모 애니 대본 유출사건을 생각해보면 납득이 가긴 갑니다
  • BlackGear 2011/04/27 00:54 # 답글

    그렇더라고요. 남이 이거 신경쓰겠지! 하고 최대로 그쪽으로 신경을 기울이면 정작 독자는 하품하고 있는.
  • 애쉬 2011/04/27 02:30 # 답글

    시나리오의 독자는 영화를 보는 관객인지 시나리오의 바다에서 허우적대는 영화제작 관계자인지 다시 생각해보게됩니다.

    쥐라기 공원의 마이클 크라이튼 소설은 읽으면 머리 속에 그림이 그려지는 듯 시각적인 소설이라 판권 사갈 사람들이 줄을 섰다 들었습니다.

    시나리오의 지문도 그런 역할 정도는 할 수 있는 바.... 아예 무시하기도 그렇네요
  • 비로그인 2011/04/27 08:03 # 삭제

    근데 '유리, 산에 가다'와 '산에 가는 유리' 정도의 단계는 시각적인 부분의 전달을 잘 하는 지문과는 관계없죠... 영상으로 치환했을 때 중요하지 않은 부분을 신경쓰지 말라는 말이겠죠 뭐...
  • seaman 2011/04/27 10:11 # 답글

    형. 아래 토르 글 있자나

    "다 접어두고, 아래에 있는 기대한다고 하신 '천녀유혼'리메이크랑 '토르'의 국내 흥행 성적 비교해보면 되겠네요.
    개봉일도 비슷하고, 둘다 외화에 환타지적인 성격이 있으니 좋은 비교거라고 봅니다. "


    이거 한번 가자. 천만 넘으면 블로그 접으니 하는 노무현 번지하는 소리 말고. 진짜 이거 한번 가보자
  • 잉그램 2011/04/27 11:21 # 답글

    말 한마디에 차이가 있듯이 문장에 의해 시각화느낌이 달라징 수 있습니다 영화학도시라면 수업에 시나리오의 중요성도 아실텐데 필름만 돌리셨나보군요
  • ㅁㅁㅁ 2011/04/27 15:42 # 삭제

    ㄴ 난독증
  • 잉그램 2011/04/27 16:01 #

    뭐가 난독증이라는 건가요?
  • 하도래 2011/04/27 11:23 # 답글

    그런 건 '권위에 호소하는 오류'라고 합니다.
  • 음.. 2011/04/27 18:36 # 삭제

    애드맨님이 분해의 오류라고 하신 이유는 알겠는데 쫌 애매하네요.
  • 서영 2011/04/27 11:24 # 답글

    시나리오를 공부했던 사람입니다
    저 정도의 고뇌를한다면 솔직히 미래가어떻든 박수를 쳐주고싶긴하네요
    문제는 가장 기본적인 맞춤법조차 마구 틀리는 분들...같은 학생끼리도 그런 부분을 발견하면 읽을맛이 뚝 떨어지더군요
    또 한가지는 윗분처럼 '감각적'이신 정도라면 다행이지요 너무 멋부려서 만연체가 되버린 지문은 소설도 별로지만 시나리오에서는 더더욱 별로더랍니다
  • 푸른미르 2011/04/27 11:31 # 답글

    확실히 소설과 시나리오는 다르네요.
  • ㄴㅇ 2011/04/27 15:47 # 삭제 답글

    ‘꽃은 피었다’와 ‘꽃이 피었다’를 놓고 극심한 고민을 했기 때문이란다


    '꽃은 피었다'와 '꽃이 피었다'가 뭐가 다르다는 건지
    한참을 뚫어지게 봤네요.

    찾다 찾다 못 찾아서 혹시 철학적인 차이를 말하는 건가 생각해보다가...
    아니겠지 하고 천천히 두 문장을 읽어보고서야,
    '은'과 '이'의 차이이구나 깨달았았음.

    아무래도 저 심각한 수준인듯.
  • ㅇㅇ 2011/04/27 16:48 # 삭제

    소설에서는 '~은'과 '~이'가 가지는 의미가 맥락에 따라 큰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문장의 비장감을 더욱 강조한다는 측면에서는 '~은'이 더 나아 보이기도 하고, 또 읽어 내려가는 운율 측면도 고려할 문제겠지요.

    다만 극화를 목적으로 하는 시나리오의 경우에는, 지문에 있어서는 보다 즉각적인 이미지화, 스토리의 박진성을 높이는 정확한 문장이 더 중요할 거라는 생각입니다. (아예 처음부터 읽기 위해 쓰여진 시나리오가 아닌 이상은 말이죠)
  • 비로그인 2011/04/27 18:36 # 삭제

    이/가는 주격조사로 '꽃'에게 문장의 주어 역할을 부여 한다는 점만을 가지고 있으니 (물론 앞 뒤 문장에 따라 맥락이 다를 수도 있습니다만) 중립적인, 좀 더 사견을 배제한 사실에 가까운 느낌을 주겠고요, 은/는은 A와 B의 대조를 보여줍니다. (철수'는' 짜장면을 먹었고, 영철'은' 짬뽕을 먹었다)

    이/가는 격조사, 은/는은 보조사로 문장에서 정해진 역할이 다르죠. 사실 그것만 알고 있으면 이 맥락에서 대조적인 느낌을 부여할지, 좀 더 fact의 전달 자체에 무게를 둘지 결정하기가 쉬울 겁니다... 물론 그 결정 자체가 쉬운 건 아니지만요.
  • 사막고래 2011/04/27 16:42 # 삭제 답글

    시나리오라는 것이 1차적 물건이긴 하지만 결과적으로 소비되는 것은 2차적으로 변주된 영상이기 때문에
    1차에서의 뼈대보다 디테일에 치중한 지문은 옳지 않다는 것이지 디테일 자체를 무시하는 이야기는 아니죠.
    다만 그런 집착을 할시간에 이야기 하나 아이디어 더 잘 다듬고 복선하나 더 정밀하게 설계하는 것이 현명하다.
    본문 이런 뜻 맞죠?

    사실 영상으로 보는 모든 것을 기억하는 사람은 없는데다가 배우, 색감, 대사, 구도, 음악 등이 총체적으로 깔려있는
    영화라는 장르의 본질상 지문의 하나하나를 모두 디테일하게 적어댈 필요는 없다고 생각됩니다. 지문자체가
    작품으로 팔려서 읽혀질게 아닌이상 어차피 변주되고 한계에 의해서 깍여나갈텐데 디테일 자체에 집착해서야 말이 안되죠.

    좋은 작품? 해리포터가 묘사를 잘해서 잘팔린 것도 아니고, 아저씨가 디테일해서 대박을 낸것도 아니죠.
    봄날은 간다라던지... 장화홍련 같은 영화라면 모르겠지만... 호러나 멜로도 아닌데 디테일에 엄청나게 집착해봤자
    편집증 그 이상이 아닌가 싶은 생각도 들고 뭐... 그렇네요 실제로 베스트 셀러 소설들이 모두 만연체나 화려체,
    혹은 묘사에 집중한 문체도 아닌데 그런 글들이 못쓴글도 아니고 말이죠.
  • 소리쟁이 2011/04/27 17:18 # 답글

    큰 그림이 잘 그려져 있어야
    디테일이 사는 거죠.

    디테일에서 큰 그림을 그려가는 것이
    무조건 나쁘다고 할 수는 없지만,
    대체로 결과가 안 좋죠..

    한 사람이 모든 걸 잘하긴 힘들기 때문에
    큰 그림을 잘 잡는 사람과 디테일을 잘 다듬는 사람이
    협력할 때 시너지가 생길 것입니다.

  • 소년 2011/04/27 17:55 # 답글

    동감합니다.
    시나리오 자체가 완성본으로 작품이 되는 게 아니니...
    여기저기 손 탄 시나리오들 보면 더 할 말이 없지요.
    지문에 집착할 때가 아닙니다.ㅠㅜ
  • 소년 2011/04/27 17:56 # 답글

    시나료의 목적은 절대 영화화!!
  • 2011/04/27 22:04 # 삭제 답글

    '은/는'과 '이/가'는 문법적으로 다른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미세한 차이기는 하지만 실생활에서도 우리는 구분해서 쓰고 있죠.

    우리가 무엇을 구분하느냐, '은/는'은 이미 행해진 행위를 설명할 때 쓰이고, '이/가'는 새로운 행위를 묘사할 때 쓰인다는 해석이 있습니다. '은/는'은 주어의 의미를 한정해서 다른 경우와 구별해주기도 합니다.

    "철수가 안했다." 라고 하면 단순히 철수가 어떤 행위를 안 했고, 다른 사람이 했는지 안 했는지는 모른다는 의미이지만,

    "철수는 안했다." 라고 하면 다른 사람은 어떤 행위를 했는데, 철수만 안했다는 의미가 될 수 있습니다. 물론 그냥 전자와 동일한 의미를 가질 때도 있지만 말입니다.
  • ㅎ훈이 2011/04/28 00:22 #

    쩝.. 달을 가르키는데 손가락을 보시는근여;
  • 2011/04/28 22:58 # 삭제

    가르키다라는 말은 없습니다. 가르치거나 가리키는 거죠.

    말도 똑바로 못 하면서 보는 눈이나 있겠나.

    웃기는 소리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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