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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해가는 영화사 직원의 눈독 비공식업무일지


회사에 비품이 다 떨어져간다.


자원절약 캠페인의 일환으로 A4용지 아껴쓰기 운동을 벌인지가 엊그제 같은데 이젠 아껴쓰고 자시고 할 A4용지 자체가 얼마 남지 않았다. 커피는 떨어지면 안 먹으면 그만이지만 A4용지가 없는 사무실은 난감할 뿐이다. 예전엔 투자 검토 차원에서 들어온 시나리오를 모니터로 읽기 불편하다고 아무 생각없이 A4용지로 출력해서 읽곤 했는데 이제는 그러면 안되는 분위기다. 눈이 아프고 피곤해도 모니터로 읽는다.

친한 직원들에게는 농담처럼 계속 월급 안 나오면 회사 비품이라도 들고 나가야 되겠다고 했는데 다들 그럴 생각을 하고 있었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공감을 해주었다.


얘기를 나눠보니 눈독 1순위는 뭐니뭐니해도 컴퓨터다. 업무 시간의 대부분을 함께해 정이 들만큼 들었고 개인정보도 많이 저장되어 있어서 남의 물건 같지 않고 컴퓨터 말고는 제대로 값을 쳐줄만한 비품도 없기 때문이다. 나도 당장 회사에서 월급 대신 뭐 들고 나갈래라고 물어보면 당연히 컴퓨터를 챙길 것이다.


2순위는 책꽂이에 꽂혀있는 책이나 디비디들이다. 대부분 본 것들이라 별로 탐나지는 않지만 뭐라도 들고 나가야 되는 상황이 발생한다면 책상이나 의자를 들고 나갈수도 없기 때문에 책이나 디비디를 선택할 수 밖에 없다. 그 다음 순위는 없다. 아무리 둘러봐도 컴퓨터나 책 그리고 디비디말고는 돈이 될 만한 것도 없다. 화분이나 영화 포스터 같은 건 짐만 될 뿐이다. 차라리 이면지를 들고 나가련다.


3순위로는 작가와의 인간 관계? 인간 관계는 알다가도 모를 성질의 것이지만 작가들과 소액의 채무 관계라면 확실히 있다. 계약금이 늦어져서 미안한 마음에 돈을 빌려줬다가 아직 못 받고 있다. 적은 돈은 아니고 많다면 많은 돈이라 받긴 받아야겠는데 먹고 죽을 돈도 없다길래 많이 난감하다. 반쯤은 포기했지만 하여간 작가와의 채무관계도 들고 나가긴 해야겠다.


직원들과 잡담을 마치고 인터넷으로 사무실에서 쓰고 있는 컴퓨터 기종의 가격 조회를 해보니 밀린 월급을 충당하려면 열대 정도는 들고 나가도 될까 말까하다는 계산이 나왔다. 사무실 컴퓨터 열대를 다 들고 나갈 수도 없고 들고 나간다 해도 보관할 곳도 없고 그렇다고 어디다 팔려고 해도 절도죄로 걸릴 것 같아 엄두가 나지 않는다.


POSCO 직원은 회사 관두고 중국에다 철강 제조 기술 팔아서 10억 넘게 챙겼다가 국정원 직원에게 걸려 감옥갔다는데 망해가는 영화사에는 경쟁사에 팔아 넘길 원천 기술 같은 것도 없다. 빼돌릴 기술도 없지만 빼돌린다 해도 업종 전체가 불황이라 빼돌린 기술을 살만한 회사도 마땅히 없을 것이다. 빼돌릴만한 기술이 있었다면 이렇게 되지도 않았겠지.


내일도 영화사는 망해가겠지만 회사 앞에 위치한 밥집 매출은 끄덕없을 것이다.

오늘따라 회사 앞 밥집 사장님이 대단하게 느껴진다.




덧글

  • 이방인 2007/10/14 18:32 # 답글

    꼭, 뭔가에 대한 마감시한이 점진적으로 다가오는 느낌입니다. 힘내세요. 뭔가 뾰족한 수가 생기겠죠.
  • 애드맨 2007/10/14 19:05 # 답글

    수는 없습니다.ㅎ;;
  • 이적 2007/10/14 20:42 # 답글

    누구나 삶의 짐을 짊어지고 가는거겠지요.
    상대의 짐을 덜어줄 순 없겠지만-그럼 내짐이 늘어나니-씩 웃으며 등을 밀어줄 순 있을 것 같습니다.
    힘내세요.
  • 애드맨 2007/10/14 22:35 # 답글

    이방인님, 이적님 감사합니다. 제가 꼭 전차남이 된 기분이에요..^^~
    이제 에르메스만 나타나면 ㅎㅎ;;
  • 그때그넘 2007/10/15 00:09 # 삭제 답글

    힘 내라고 해서 힘이 날 일도 아니고, 망하지 않았으면 한대서 망할 회사가 망하지 않을리도 없지만 아무쪼록 블로그 만이라도 꾸준히 유지되었으면 하는 바램입니다.
  • 마리 2007/10/15 10:06 # 삭제 답글

    힘 내세요...저도 망해가는 영화잡지사에서 300만원짜리 EOS 카메라를 들고 나오고 싶었지만 절도죄라고 하길래 관뒀습니다. 밀린 월급 생각하면 그것도 보충이 될까말까였는데..
  • gungak 2007/10/15 20:50 # 삭제 답글

    밀린 월급이 회사 채무보다 변제 우선 순위인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회사에 대해 밀린 월급 변제에 대한 증빙 같은 것을 준비해두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무엇이 필요한 지는 저도 확실히는 몰라서요)

    그 뒤에는 회사 비품을 채무자들에게 안뺏기도록 잘 감시해야 합니다. 진짜 아무것도 남지 않게될 수 있거든요....

    에궁.... 회사일이 잘 풀려야 하는 것이 우선인데 이런 글을 적다니.....
  • 애드맨 2007/10/15 23:34 # 답글

    다들 감사합니다...
  • 지나가는 2007/10/16 09:40 # 삭제 답글

    차라리 이면지를 들고 나가련다.




    ...........................

    --> 울 뻔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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