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게 재능이 있다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을까?
고등학교 때 자율학습이 끝나고 집에 가던 도중 길거리에서 영화를 찍는 사람들을 처음 보고는 나도 영화를 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문제는 영화를 하려면 재능이 있어야 된다고 생각했는데 나에게 재능이 있다고 자신있게 말해주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는 것이었다. 100명 중의 1명이 성공할까 말까한 분야니까 어지간하면 다른 일하라는 선생님과 부모님의 조언을 무시하고 나에게는 재능이 있긴 있는데 아무도 모르는 것 뿐이라는 결론을 내리고 진로를 결정했었다. 아무리 확률이 희박해도 나는 살아남는 소수가 될 수 있으리란 근거없는 노름꾼의 희망 비슷한게 있었던 것 같다.
그리고 세월이 흘러 흘러 2007년 가을.
이 바닥에 발을 들인 후 최선을 다 했다고는 할 수 없지만 마냥 놀지는 않았는데도 이 모양 이 꼴인걸 보면 재능이 있었다고는 차마 말 못하겠다. 예전 같으면 <나는 이제 끝난걸까?>라고 자책하다가도 <바보! 아직 시작도 안했잖아!!>라며 유치하게 용기를 내곤 했는데 그땐 정말 아직 시작도 안했기 때문에 그런 생각을 할 수 있었지만 현재 스코어 몇 번이고 거듭해서 시작을 해 보고 지지부진 흐지부지 해봤기 때문에 더 이상 그 대사를 떠올려도 용기는 나지 않는다.
내가 주도했던 혹은 참여했던 영화들이 실날같은 희망은 보여준 적은 있어도 결과적으로 비평이든 흥행이든 성공한 적이 한번도 없고 몸 담았던 회사들은 전부다 망하거나 기울었으며 혹시나 잘나갈 것 같아 들어왔던 지금의 회사 역시 망하기 일보직전이다. 지금 우리 망해가는 영화사의 분위기는 빙하 충돌 후 침몰하는 타이타닉에서 서로 살겠다고 구명보트에 달려드는 형국과 비슷하다. 웃긴 건 고등학교 때 자율학습 끝나고 길거리에서 촬영과정을 목격한 영화조차 극장 개봉 후 처절하게 흥행에 실패하고 평론가에게도 무시당했는데 나의 진로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이 영화의 운명이 내 영화 인생의 복선이나 암시 같은 게 아니었나 싶기도 하다.
<언니가 간다>처럼 타임머신을 타고 과거로 돌아가 영화 촬영장 주위를 얼쩡거리는 과거의 나를 발견하면 삥이라도 뜯어서 영화에 관련된 나쁜 추억이라도 만들어줘야할 것 같은데 그렇다면 영화 말고 뭘 하고 싶은건데 라고 물어봐도 딱히 하고 싶은 건 없고 아무리 이 모양 이 꼴이래도 신기하게 후회는 없다. 그냥 영화가 좋았고 영화를 만드는 일을 하며 살고 싶었던 것 뿐인데 이렇게 안 풀릴 줄 이미 알고 있다고 해도 다른 일을 하고 싶은 마음은 지금도 전혀 없는 것이다. 짝사랑이군.
그렇다면 나에게는 정말 재능이란 없는 걸까?
이 나이 먹고 재능이 있네 없네 고민하는 것도 웃긴 일이지만 재능이 없는데 재능이 있다고 착각하며 살았다니 왠지 허무하다. 그런데 재능이 있고 없고를 떠나 점점 의식적으로 영화를 멀리하고 있는 나 자신을 느낄 때마다 재능없음 보다 절망적이라는 과거에 영화를 하려고 했으나 별 볼일 없이 열정이 사라져 퇴락해버린 전직 영화인 중 일인이 되는 것 같아 정신이 번쩍 들기도 하는데 다시 한번 해보려는 에너지가 별로 안 느껴져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다.
하여간 이젠 나에게 충분히 재능이 있다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이젠 뭘 믿고 버텨야 되나.




덧글
2007/10/28 02:41 # 답글
비공개 덧글입니다.정도에서도 한계를 느끼는 수준이라...
힘 내세요. 나쁜 일만 있겠습니까? 좋을 때도 곧 오겠지요. ^^
2007/10/28 15:01 # 답글
비공개 덧글입니다.레이린님 // 과분한 칭찬에 몸둘바를 모르겠습니다.
아슈님 // 저는 낙담하는 거에 재미 붙였습니다ㅎㅎ
마리님 // 미련같아요;;
구여운영 // ^^
ㅇ비공개님 // 님의 댓글을 보면 즐겁습니다^^
키리에님 // 남들 다 자는 시간에 후회가 없다는 주제로 블로그에 넋두리를 늘어놓는 사람이 쿨해보이세요?ㅋㅋ;;
2007/10/30 11:00 # 답글
비공개 덧글입니다.가장 큰 재능인 것 같아요.
ㅋㅋㅋ정말 저도 그런것같아요 재능이 있는데 알아보는 사람이 없다고 생각하고ㅋㅋㅋㅋ
오늘 첫웃음주셔서 감사합니다ㅋㅋㅋ